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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치료

상계백병원 심리극

 

 

 

2014년 2월 26일.

오늘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병동 심리극에는 입원한지 며칠 안된 이십대 중반의 남성이 참석했다.

어차피 인생 그 자체가 연극이라 생각하고, 자신은 이 곳에서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심리극에 관심없고 동참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 극을 준비하는 과정에 끼어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여러번 극 진행이 중단되었다( 그 남성의 이야기 중에는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보니까 평소 화를 잘 내는 성격이네요. 이런 곳에서는 안 그런 척 하면서, 집에서는 평소 성격대로 가족들에게 불같이 화내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제 눈을 속이지 마세요...'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

말에 점점 두서가 없어지고 길어지면서, 다른 분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말 없이 몸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해보는 것'으로 진행 방법을 바꾸었다. 정해진 시간동안 모두가 말없이 몸을 움직이자 그 남성도 말없이 자신만의 몸짓을 하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몸짓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갖자 그 남성도 자신의 몸짓을 설명했다.

다시 심리극을 진행하려 하자, 그 남성은 구석에서 쉐도우 복싱을 하고 싶다고 하여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우리끼리 주인공을 정하고 주인공의 의견에 맞춰 심리극을 진행하자, 혼자 쉐도우 복싱을 하던 그 남성은 갑자기 역할을 달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주인공에게 역할을 요청했고, 주인공은 초등학교 2학년인 막내 아들 역할을 맡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남성은 한부모 가족의 가장인 아빠(주인공)에게 짜장면을 사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 남성의 떼쓰는 연기를 보는 순간, 나는 연기자들에게 초등학교 자녀 세명 모두가 아빠에게 떼쓰는 장면을 만들어보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그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빠에게 노래를 들려주겠다며 옛 유행가 한소절을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노래하듯 혼자 부르기 시작했고, 다른 두 자녀는 물건을 놓고 싸우는 모습을 즉흥적으로 연기했다. 주인공은 어떻게 세 아이들을 다루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나는 자발적으로 이웃사람이 되어 나무재질의 의자를 쿵쿵쿵 두드리면서 "좀 조용히 합시다! 잠 좀 자자고!"라고 외쳐주었다.

나를 포함해 프로그램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맡은 연기에 몰입하여 혼란스러운 집안 풍경을 훌륭하게 잘 표현해주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간호사 두명이 프로그램실로 급히 오는 바람에 심리극도 급히 중단되었다. 갑자기 모든 연기자들이 연기를 멈추고 간호사를 쳐다보자 간호사들은 순간 연극 중이었다는 것을 인식했고, 내가 연극 중이라고 설명해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각자 소감을 나누는 동안, 그 남성은 자신의 차례를 조용히 기다리며 다른 사람의 소감을 경청하고 있었다. 자기 차례가 되자 그 남성은 자신의 연기는 어렸을 때 했던 모습이기 때문에 거짓연기는 아니었고, 자신은 어렸을 때 떼를 잘 썼기 때문에 연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 남성이 두서없는 이야기를 계속 꺼냈던 시간 약 40분, 말없이 몸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해보는 것과 설명하는 시간 약 5분, 주인공을 정해 주인공이 원하는대로 한부모 가정의 모습을 연기해본 시간 약 10분, 소감을 나누는 시간 약 5분... 총 60분이라는 시간동안 그 남성이 직접 동참한 시간은 약 15분쯤이었던 것 같다.

그 남성은 처음에 자신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말하려 했고, 혼자만의 쉐도우 복싱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나중에는 타인의 역할부여를 수용했고, 부여된 역할에 맞게 연기했고, 다른 사람들의 소감을 경청한 뒤 자신의 연기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은 즉흥극, 역할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리극의 흔한 형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남성을 자연스럽게 15분동안 함께 할 수 있도록, 45분을 투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쨌거나 오늘 심리극은 주어진 60분동안 모두 참여해 함께 극을 만들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