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진행했던 강서필병원 심리극을 떠올리며.
첫번째 심리극에서는 자발적으로 입원한지 며칠되지 않은 분의 이야기를 극으로 다루어보았다.
술자리도 갖고 금주에 대한 결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순간 술과 관련된 주인공의 신체들과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인공 앞에 '술'이라고 명명한 의자를 놓고, 자신과 술을 연결해주는 신체부위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의견을 구했다.
주인공은 손, 발, 위, 간을 떠올렸고 나는 관객들 중 적극적으로 동참해주시는 분들 위주로 동의를 구하고 주인공의 신체부위를 맡도록 부탁했다.
나는 손, 발, 위, 간 역할을 맡은 배우를 한분씩 호출하여 주인공이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한 것에 대한 죄를 물었다.
각 신체부위는 ' 뇌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움직였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각 신체부위에게 앞으로 주인공이 술을 마시게 되면 각자 최선을 다해 술을 못 마시도록 거부반응을 보이도록 부탁했다.
손 역할을 맡은 분에게는 주인공이 술잔을 잡아서 입안으로 털어넣지 못하도록 무조건 정지자세를 유지하도록 부탁했으나, 손 역할을 맡은 분이 눈 앞에 있는 술잔을 자신도 모르게 털어넣었고, 순간 모두 갑작스러운 결과에 웃으면서 극이 마무리 되었다.
발 역할을 맡은 분에게는 주인공이 술자리에 가거나 술을 사러 가지 못하도록 술생각만 하면 무조건 가만히 서있도록 부탁했으나, 발 역할을 맡은 분은 "뇌가 들어가라고 시키는데 안가면 안되지~"라고 말한 뒤 웃으며 자리를 떴고 관객들도 함께 웃었다.
위 역할을 맡은 분에게는 혹시라도 주인공이 입안에 술을 털어넣으면 곧바로 뱉도록 위를 강제로 뒤틀거나, 술이 위에 도달하면 구토를 해서라도 술을 흡수하지 못하도록 부탁했으나, 위 역할을 맡은 분은 앞으로 술자리에 가게 되면 미리 맥주를 두잔 정도 마시면 된다는 발언을 해서 관객들의 웃음이 터졌고 극이 중단되었다.
간 역할을 맡은 분에게는 혹시라도 주인공이 술을 마실 것 같으면 온몸에 경고신호를 보내도록 부탁했으나, 술이 몸에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는 춤을 추었고 관객들의 웃음과 함께 극이 마무리 되었다.
주인공은 이 과정을 진지하게 지켜보았고, 나의 요청에 따라 뇌 역할을 맡아서 술을 마시도록 신체부위를 조종하는 것에 대해 답변하도록 했다.
뇌의 입장에서는 머리가 늘 복잡하고 잠도 잘 안오다보니 술이 약이라는 생각으로 마셨고, 술 덕분에 잠이 잘 와서 계속 술을 마셨다고 답변했다.
나는 뇌(주인공)에게 잠이 안오면 정신과의사의 도움을 받아 수면제 처방을 받아서 정말 약을 복용해야지, 술이 약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뇌는 약을 먹으면서까지 잠을 자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주인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리극에 참가한 환자들과 연극에 대한 소감을 나누면서, 비록 웃으면서 극적인 경험을 했지만, 막상 퇴원 후 내 앞에 술이 있다면 금주의 결심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순간 대부분 한숨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이거나 표정이 굳어졌다.
심리극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 되었지만, 이대로 마무리 지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간을 조금 초과하더라도 서로 심리극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진행했다.
어떤 환자는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술에 대한 생각이 별로 안 생기는데, 심리극 시간만 되면 술생각이 간절해져서 심리극에 참가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자 늘 심리극에 참가해온 다른 환자가 '심리극 덕분에 술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고, 금주에 대한 결심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말해주었고 다수가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처음 심리극을 경험해보고 다른 환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한번 더 술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술은 약이 아닌 독'이라는 생각을 뇌에 잘 새겨서, 퇴원하게 되면 심리극 주인공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금주 결심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순간 관객들은 주인공을 향해 박수를 쳐주었다. 나는 그 모습이 주인공의 결심을 지지하고 격려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과 이 자리에 함께한 다른 환자들을 위한 박수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첫번째 심리극이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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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심리극에서는 평소 관객으로 참여해오다가, 주인공 경험을 하기로 결심한 분이 자발적으로 손을 들어 주인공이 되었다.
주인공은 몇년동안 대화가 단절된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해보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주인공은 주인공의 자리를 유지한채 주인공이 직접 설정한 주인공과 아버지의 대역들이 하는 대화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정리해보도록 했다.
아버지 역할을 맡은 대역환자(여성)는 주인공이 말했던 냉정한 아버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무조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딸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주인공이 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부탁했으나, 대역을 맡은 환자는 이에 저항하듯 계속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아버지 대역을 맡은 환자에게 주인공에게 가서 하고 싶은 말을 마저 하시도록 권했다. 순간 아버지 대역을 맡은 환자는 울면서 환자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으며 정말 딸에게 말하듯 길게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주인공도 함께 우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 대역을 맡았던 여환자에게 주인공 옆에 앉아 있도록 한 뒤, 아버지 대역을 맡아주실 분을 공개모집했다. 젊은 남성이 자발적으로 아버지 역할을 맡았는데, 자신의 아버지와는 상반된 모습이어서 잘 연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주인공이 했던 말을 참고로, 나름대로 차가운 아버지의 모습을 표현해보다가, 주인공이 느끼기에 아버지와 다른 느낌이면 주인공이 직접 극에 개입하기로 하고 계속 진행했다. 극은 원활하게 진행되었고, 주인공은 두 대역의 연기가 공감된다고 했다.
나중에는 주인공이 직접 아버지가 되어, 최대한 아버지와 비슷한 말투로 딸(대역 주인공)에게 말해보도록 했다. 주인공은 차갑고 단호한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했다.
한 여성관객이 울기 시작했고 아버지 역할을 맡은 주인공에게 마치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하듯 섭섭함을 표현했다. 갑자기 극진행은 관객(딸)과 주인공(아버지)의 설전으로 이어졌다. 순간 주인공의 대역을 맡은 환자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너무 답답해요..."라고 말했다.
설전의 내용이 반복되면서 길어진다는 판단이 들어 중단시켰다. 연기에 몰입했던 관객과 주인공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고 감정상태는 괜찮은지 점검했다. 다행히 두 사람 다 연극에서 벗어나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관객 중에서 차갑고 단호한 이 아버지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분이 있으면 말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러자 몇
몇 관객들이 아버지에게 지나친 차가움과 단호함에 대해 비판했다.
관객들의 비판이 끝나고 계속 진행을 이어가려는 순간, 관객석에서 조용히 심리극을 지켜보던 한 여성이 손을 들었다. 나는 '말해도 좋다'는 손짓을 보냈고, 그 여성은 차분한 말투로 아버지 역할을 맡은 주인공에게 자신의 차갑고 단호함에 대해 사과했고 이렇게 자라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주인공은 '아버지께서 정말 이렇게 말해줄 것만 같고, 이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행복한 느낌이 든다'고 울면서 말했다.
심리극 진행시간이 초과되었지만, 이대로 주인공을 보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인공에게 마무리를 위해 한장면만 더 설정하고 싶다고 제의했고 주인공의 동의를 받은 뒤, 나는 의도적으로 아버지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게 극을 진행하고 싶다고 주인공에게 설명해주었다.
주인공은 듣고 싶은 말을 대사로 만들어 차분히 말했다. 나는 관객들과 대사를 몇번 반복해서 말해본 뒤, 이 말을 해줄 아버지 대역들을 모집했고, 남성들은 무조건 아버지 역할을 맡도록 부탁했다.
모든 남성참가자들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여성환자들이 길게 줄을 섰고, 한사람씩 주인공의 어깨에 두 손을 살며시 올리고 주인공이 부탁한 대사를 기본적으로 하면서 자신이 추가로 하고 싶은 말을 더 해주었다.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연했던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했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관객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도 이번 심리극 진행을 도와준 분들과 공감을 표현해준 분들, 그리고 주인공의 이야기를 경청해준 관객 모두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어제 강서필병원에서 진행했던 두번의 심리극 모두 처음 주인공을 경험하는 분들이었고, 많은 관객들이 조연으로 동참해 주인공의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이번 심리극은 주인공 뿐 아니라, 심리극에 함께한 다수의 사람들도 주인공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었고, 연극적인 방법을 통해 안전한 투사를 시도해보거나, 머리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각자 '나만의 심리극'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주 강서필병원 심리극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