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속에서~

페이스북의 '알 수도 있는 사람'

 

 

 

페이스북에 '알 수도 있는 사람'으로 뜨는 어떤 인간.

그 인간은 몇년전 서강대에서 개최된 비블리오드라마 워크샵 이틀째 되는 날 내 옆에 앉았었다.

첫날 참석하지 않은 탓에, 내용 이해가 안된다며 나에게 계속 해설을 요청했는데, 반말을 교묘하게 섞어 써서 불쾌했었고, 진행 중인 워크샵 내용을 경청하고 이해하는데 계속 지장을 주었다. 그리고 이 분야와 관련된 기본적인 지식이 너무 없어보였고 피곤하기도 해서, 계속 해설을 요청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별도의 공부를 권해주었다(대부분의 권유는 "그 부분은 심리극 관련 책을 보시는게 더 좋겠습니다"였다).

쉬는 시간에 자기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늘어놓는데, 외국에서 유학하고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최근 연극치료에 관심을 갖고 배우러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늦게 참석하는 바...람에 자료 하나(소책자)를 못 받았다며, 복사하고 내일 돌려줄테니 하루만 자료를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기꺼이 빌려주었다.

바로 다음날(워크샵 마지막 날) 그 인간은 다른 곳에 앉아 있었다. 쉬는 시간에 찾아가 자료를 돌려 달라고 하니, 잊어버리고 안 가져왔다고 한다.

나는 꼭 그 자료가 필요하다고 말하니 주소를 알려주면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명함을 주시면 이메일로 주소를 알려드리겠다 하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명함을 건네주었다. 명함을 보니 어느 예술단체의 대표였다.

워크샵이 모두 마무리 될 때쯤, 나는 평소 휴대하던 디지털카메라를 꺼내어 당시 워크샵에 참석한 지인에게 부탁해 플랜카드를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었다(나는 워크샵 강사와 인증샷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자 그 인간이 다가와 다정한 말투로 워크샵 강사와 사진을 찍고 싶으니 그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기꺼이 사진을 찍어주니, 아까 준 명함에 나와있는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다.

귀가 후 이메일로 주소를 알려주면서 전문가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첨부해주었는데 한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장도 소식도 없었다. 굳이 목소리를 듣을 필요는 없어서, 답장이 올 때까지 매일 오전에 이메일 한번, 오후에 문자 메시지를 한번 보냈다.

2주만에 이메일로 답장이 왔는데 그동안 바빠서 답장을 할 수 없었고 자료를 돌려줄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답장을 통해 직장 주소를 한번 더 보냈다. 이후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한달이 또 지났다.

또 다시 이메일과 문자를 보내니 삼주만에 이메일로 답장이 왔다. 어차피 곧 우편으로 보내줄건데 너무 독촉하는 것 같아 불편하단다. 그리고 일주일 뒤 직장 우편함에 내 앞으로 우편물이 와있었다.

내 앞으로 온 우편물은 넓직한 서류봉투가 아닌, 곧 터질 것 같은 빵빵한 편지지 전용 우편봉투였다. 겉봉을 보니 내 이름과 주소를 갈겨썼고 보낸 사람의 이름과 주소는 없었다.

우편봉투는 내용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1/3정도가 뜯겨져 있었고, 다른 우편물들에 시달렸는지 봉투 여기저기가 더러워져있었다.

봉투를 뜯어보니 세상에! 스테플러가 찍힌 10장 정도의 A4 종이를 억지로 쑤셔 넣은데다, 시행착오로 의심되는 두번의 접힌 흔적이 보였고, 내용을 보니 흐릿하게 복사된 사본이었다...

내가 빌려준 원본을 꿀꺽했군!

사본은 당시 워크샵 자료들과 함께 보관해두었다. 곧바로 항의전화나 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내지 않는 대신, 어차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언젠가 마주치면 직접 혼을 내주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어느새 몇년이 지났고 그 인간과 마주칠 일은 전혀 없었다.

페이스북의 '알 수도 있는 사람' 덕분에 그 인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고 요즘 근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다양한 예술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치유하는 중이고, 재능있는 후배들을 양성 중이라는 50대의 모 예술단체 대표.

나처럼 실물을 못 알아볼 수도 있는 잘 나온 옛 사진을 프로필로 올려놓았다. 정보를 살펴보니 어느 명문대 출신으로 유학도 다녀왔고, 다양한 예술활동 경력과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었으며, 주님과 기도를 언급한 것을 보니 개신교인 같아 보였다.

나는 이런 인간과 같은 하늘아래에서, 같거나 혹은 비슷한 '연극적인 방법'으로 먹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