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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기

다시 보는 영화 '시네도키, 뉴욕(Synecdoche, New York)'

 

 

영화를 보는 동안 계속 떠올렸던 단어는 '잉여현실'이었고, 한사람의 주인공이 설정한 수많은 비네트(vignette)로 구성된 한편의 심리극을 보는 것 같았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protagonist)이 있고, 주인공이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매입한 공간은 마치 심리극의 무대처럼 주인공의 잉여현실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세트로 만들어지고, 주인공에게 의미있는 사람들은 보조자아(auxiliary ego)에 해당되는 연기자들이 연기하고, 연기자들의 언행을 통해 내 자신을 거울처럼 비춰보기도 하고, 주인공이 연기자에게 연기지시를 내릴 뿐 아니라 연기자들의 언행이 거꾸로 주인공의 삶에 반영되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사람이 원하는 역할연기를 자원하고 서로 협의하기도 하고, 디렉터일지도 이중자아일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따라 연기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중에 심리극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해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든다.

 

지나간 현실은 되돌릴 수는 없다. 재현할 수는 있어도 지나간 시간을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재현 속에 머물려 애쓰다보면 이 또한 또 다른 현실이 된다.

 

그렇기에 과거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고 감정을 어루만지는 것이 심리극에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이고 한계인 것 같다.

 

- 2010년 1월 26일 블로그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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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4일, 지금은 사라진 중앙시네마에서 영화 ‘시네도키, 뉴욕’을 처음 보았고, ‘한 사람을 위한 한편의 긴 심리극’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 마침 인간관계의 유지와 단절에 대해 깊이 고민할 때였기에, 이 영화는 나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6년전 블로그 글에 좀 더 생각을 추가해보면, 극작가이면서 연출가인 주인공은 심리극의 진행자(디렉터)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창고 안 연극무대는 주인공의 과거를 재연하면서 귀인의 장소로 활용되는 것 같고, 주인공의 지시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들은 주인공의 경험을 안전하게 투사해주면서 주인공의 잉여현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보조자아처럼 보인다.

 

창고가 점점 더 커지고 연극무대와 배우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주인공이 창고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아에 창고 안에 머물게 되는 것은, 늘어나는 주인공의 잉여현실에 비해 잉여현실을 성숙하게 다루어주고 현실에 반영할 수 있는 행위완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만약 수많은 잉여현실들을 재연을 통해 성찰하고, 창고 밖 현실에 반영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주인공은 행위완성의 시도없이 그저 살면서 늘어나는 잉여현실을 계속 배양하기만 한다. 그러다가 어떤 배우는 다른 연극공연을 위해 떠나고, 어떤 배우는 17년째 공연준비만 하고 있음을 주인공에게 토로하기도 한다.

 

주인공을 오랫동안 지켜봐왔고 주인공의 대역을 맡던 사람이 목숨을 건 행위완성의 방법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대역에게 오히려 ‘난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땐 누군가 나를 막았어’라며 당장 일어나라고 소리친다. 이 모습은 주인공이 잉여현실을 행위완성으로 연결하기 보다는 단지 현실에서 받은 상처들을 스크랩하듯 무대 위에 재연만 계속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노쇠하고 현실과의 교류가 줄어들면서 창고의 크기와 연기자는 서서히 줄어들고 잉여현실을 다루던 창고가 결국 폐허로 변하는 모습은 마치 진행자의 독단에 의한 경직된 심리극이 어떤 결과를 보여주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심리극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각자의 생각과 느낌을 풍부하게 공유하고 토론할만한 좋은 소재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특히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모습은 행위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행위완성을 했다면 이것은 누구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일까? 이러한 내용으로 토론해보면 좋을 것 같다.

 

‘시네도키, 뉴욕’은 주위에 쉽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심리극에 가까운 영화라고 생각하기에, 심리극에 관심있는 분께 추천하고 싶다.